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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민애의시가깃든삶

벚꽃, 가난, 아나키스트 - 장석주

by goldstart 2024.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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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하나에 추억과, 꽃 하나에 기억과, 꽃 하나에 모든 그리움

벚꽃, 가난, 아나키스트

 

벚꽃 다 졌다.

꽃 진 자리에 어린잎들이 올라온다.

올해의 슬픔은 다 끝났다.

열심히 살 일만 남았다.

 

가난은 빛이 모자란 것,

구두 밑창이 벌어지는 슬픔,

 

살강의 접시들과 저녁밥 짓던 형수,

옛날의 소년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나는 잘못 잘지 않았으나

저 어린잎만큼 후회가 많구나.

 

단추 두어 개 떨어진 셔츠는 사라졌다.

당신은 그 자리에서 기다리는가?

 

자, 네게 건네는

하얀 달을 받아라.

 

- 장석주(1955 ~)

 

'벚꽃'이라는 단어는 많은 사람에게 제각기의 의미로 피어난다. 벚꽃 핀 길을 함께 걸었던 그 사람은 지금 당신 곁에 있을까. 떨어지는 벚꽃을 잡으려던 그 시절은 여전히 기억에 있을까. 벚꽃을 보면 조금 멈칫하게 되는 이유는 예뻐서만은 아니다. 꽃이 피면 10년 전, 20년 전의 시간이 함께 돌아온다. 그때의 나와 사람과 마음도 돌아온다. 어쩌면 나무에 달린 꽃송이의 수보다 꽃에 담긴 의미의 수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

 

이 시인에게 벚꽃은 무엇일까. 그는 벚꽃이 다 졌으니 '올해의 슬픔'이 끝났다고 말한다. 작년에도 '작년의 벚꽃'과 '작년의 슬픔'이 있었다는 말이다. 내년에도 '내년의 슬픔'을 다시 슬퍼할 것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시인은 벚꽃을 잃어가는 내내 슬펐다. 하나씩 떨어지는 벚꽃에는 무엇이 있었기에 슬펐을지 궁금하다. 짐작건대 거기에는 시인이 사랑했던 모든 것이 들어있었을 것이다. 꽃 하나에 꿈과, 꽃 하나에 청춘과, 꽃 하나에 기억이, 다시 말해 꽃 하나씩에 모든 그리운 것들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왔다가 사라지는 모든 소중한 것에 이 시를 전하고 싶다.

 

나민애 문학평론가

 

***

벛꽃은 젊은 시절의 화려함을 나타내고, 가난은 그 화려함이 끝나고 난 뒤의 허망함을 나타내는 듯하다. 아나키스트라는 것은 아무것에도 속해있지 않은 퇴직 후의 상태를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나의 젊은 시절은 끝났지만 우리 자식들이 잘 자라고 있다. 자식들에게 부담되지 않고 조용히 베풀면서 살 일만 남았다. 한 때는 풍요로웠지만 이제는 자식들이 다 떠나고 난 자리 생명이 부족한 노년은 가난과 슬픔이다.

 

한 해 한 해 기뻣던 일, 슬펐던 일, 다양한 일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살아왔고 또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 때론 힘들고 지치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지나고 보면 모든 것들은 추억이고 아름다운 기억이 된다. 그때 잘 버텨냈기 때문에 지금이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그럭저럭 살아왔지만, 그다지 여유나 멋이 없이 밋밋하게 살아왔지만 그래도 우리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의 우리의 자식들에게는 좀 더 좋은 환경 속에서 자랄 수 있도록, 또 앞으로도 좀 더 멋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지원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보람으로 생각해 본다.

 

***

 

이 시는 문학동네 시인선 208 장석주 시집 꿈속에서 우는 사람에 수록된 시이다.

문학동네 시인선 208 장석주 시집 꿈속에서 우는 사람, 2024.03.29.

단어

  • 아나키스트: 무정부주의를 믿거나 주장하는 사람
  • 살강: 그릇 따위를 얹어 놓기 위하여 부엌의 벽 중턱에 드린 선반. 발처럼 엮에서 만들기 때문에 그릇의 물기가 잘 빠진다.

장석주 시인

장석주(음력 1955년 1월 8일 ~)는 시인이자 소설가, 문학평론가,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다. 현대인의 내면을 탐구하며, 사랑과 자유로의 도약을 그리는 다양한 감정과 생각을 전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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