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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법의 실체는? 그리고 집행은

by 상식살이 2024.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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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관에서 앞에서 논쟁을 벌이는 모습/사생활의 역사

정상적인 시기에 로마의 풍습은 시민법 속에 정확히 반영되었다. 시민법을 지배적인 윤리에 연결시켜주는 끈은 결코 한번도 끊어진 적이 없었다. 로마의 시민법은 개념적이라기보다는 구어적인 성격에 강했고, 또한 거의 연역적인 성격을 띠지 않은 데다 기교적으로도 아주 복잡했기 때문에 법률 전문가들은 기회가 올 때마다 자신의 전문성을 뽐낼수 있었다.

 

로마 사회처럼 불평등주의에 기반하고 있는 사회, 수많은 보호-피보호 관계의 그물로 뒤얽혀 있던 사회에서 극히 형식적인 법은 조금도 현실적이지 못했고, 약자가 법정에 호소한다 해도 강자에게서 별로 얻어낼 것이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공권력이 개인들간의 불화를 제거해주기는 커녕 오히려 조장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예가 있다.

 

로마의 한 시민이 작은 농장을 하나 소유하고 있는데, 이곳을 이웃의 세력가가 탐내 그가 무장한 노예를 거느리고 쳐들어와서 농장을 지키려고 애쓰는 그 시민의 노예들을 죽이고 그 시민을 사정없이 때려 쫓아낸 뒤에 농장을 마치 제 것처럼 차지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근대의 시민이라면 판사 앞에 소장을 들고가서 재판을 청구하고, 공권력을 설득해 재산을 되찾으려고 할 것이다.

 

고대말기 로마 지역 총독들이 모든 면에서 공적인 권력으로 통제하는데 성공하게 되었을 때는 모든 일이 거의 이와 비슷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2~3세기 이탈리아에서는 사태가 아주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이웃의 세력가가 그 시민을 공격하는 것은 순수하게 시민법을 위반한 것으로 형법에 관계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원고로서 법정에 출두할 때 그를 동반하는 것은 피해자의 몫이었다. 그렇게 하려면 가해자를 그의 부하들에게서 빼앗아 재판이 열릴 때까지 자기집 감옥에 가둬놓아야 했다.

 

그를 판사 앞에 데리고 나가지 못하는 경우에는 결코 재판을 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만일 운이 좋아 피해자를 보호해주겠다고 나타난 세력가의 도움을 받아 가해자인 이웃 세력가를 법정에 출두시킬 수 있다면 재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피해자는 자기 권리를 되찾을 수 있는 판결을 받게된다.

 

하지만 이제 이 판결을 실천에 옮길 방안 또한 피해자 스스로 찾아야 한다. 그러면 원고는 무력을 동원해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농장을 되찾으면 그만이었을까? 그렇지 않았다. 판사는 피고에게 원고에게서 빼앗은 것만 되돌려주라고 판결할 수 없었다. 원고의 농장은 그것대로 그의 운명에 맡긴 채 판사는 원고에게 피고의 재산과 영지를 모두 빼앗을 권리를 주었다. 원고는 그것을 경매에 부쳐 판사가 원고가 이전에 빼앗긴 농장의 값에 해당한다고 인정하는 만큼의 돈을 따로 떼어놓은 다음 나머지는 피고에게 돌려주었다.

 

땅을 놓고 다투는 고집 센 세력가들은 각자 자기가 옳다는 판결을 받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대중 앞에서 내놓고 심판을 받고 싶어했다. 대중은 궤변을 일삼기 좋아하는 로마인들의 열정을 갖고 열번을 토하는 광경을 보기를 좋아했고, 법정에서 웅변을 듣기를 즐기기 위해 재판을 따라다녔다.

 

이처럼 다른 시대 같으면 결투나 증언으로 이러한 분쟁을 해결했겠지만 이들은 싸움을 법정에서 해결하려고 했다.

 

또는 이와 다른 경우로 채권자는 채무자가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소송을 제기했는데, 이때 이미 채무자는 전혀 저항할 처지가 못되었다. 채무자는 몇차례 숨바꼭질 끝에 채권자에게 잡히게 된다. 이처럼 법에 호소하는 것은 사회적 시합에서 동원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수단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고, 일부 사람들은 제발 그러한 일을 당하지 않기를 바랐다.

 

이처럼 법은 일종의 책략으로 구사되었지만 동시에 오래된 로마 문화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이기도 했다. 법적 수단에 호소하고 시민법의 세목들을 능수능란하게 이용하는 것은 세련된 행위였다.

 

이처럼 은근히 변덕스러운 로마법은 민중적이고 사적인 정의의 잔재를 포함하고 있었다. 제정 시대에도 여전히 거리에서 재판을 하는 광경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빚쟁이가 돈을 잘 갚지 않는 채무자에게 빚을 받아내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그의 집으로 갑자기 쳐들어가 그를 연행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야유를 퍼붓거나 그를 놀려대는 노래를 부르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이 노래의 후렴은 빚을 갚으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법률가들은 단지 채무자를 발가벗기지는 말고, 노랫말도 너무 야하지만 않으면 된다고 했다. 일종의 증인으로 법정에 나온 이웃사람들의 체면도 존중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채무자는 나름대로 사람들에게 불쌍하게 보이려고 노력했는데, 완전히 포기한다는 표시로 상복을 입고 더이상 머리도 깎지 않았다.

 

이렇듯 여론에 대한 두려움이 사생활에서 커다란 역할을 했고, 대중들은 이러한 사생활의 합법적 재판관으로 기능했다. 작은 도시에서는 여론을 무시하는 고집불통들에게 온갖 종류의 '샤리바리' 를 가했다. 먼저 무리를 지어 그의 집으로 쳐들어가 그를 잡아 죽은 것처럼 영구차 위에 앉혀 놓고, 이 가짜로 '죽은 자의 뒤를 울고 웃으며 따라가다가 그가 도망치게 내버려두었다. 심지어 유언을 인정할 수 없는 때는 진짜로 죽은 사람까지도 모욕했다. 또 죽은 명사를 기리는 검투사 시합에 드는 비용을 내놓지 않아 대중을 격노시킨 인색한 상속인도 이러한 모욕의 대상이 되었다. 로마의 소지역에 사는 평민들은 옛 관리의 장례 행렬이 광장을 지나가지 못하도록 가로막았다. 결국 그의 가족은 장례식 때 구경거리를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한 뒤에야 비로소 화장터로 상여를 끌고 갈 수 있었다.

 

출처: 필립 아리에스, 조르주뒤비 책임편집 사생활의 역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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