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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법의 개인주의

by 상식살이 2024.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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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관 앞에서 논쟁을 벌이는 모습. /사생활의 역사

 

법의 어머니라는 명성을 가지고 있는 로마는 법치 국가로서 어느 누구도 법에 정해져 있지 않는 것을 억지로 할 필요가 없으며 어느 누구도 공공의 정의를 무시하고 멋대로 행동할 수 없는 나라였다.

 

남녀 모두 평등하게 이혼할 수 있는 자유를 갖고 있었고. 재산을 자유롭게 양도할 수 있었으며. 유언자도 폭넓은 자유를 누렸다. 어떠한 종교도 강요하지 않았다. 도시마다 모시는 신들이 달랐으며, 개인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신을 모셨다. 여러 신을 받드는 신에 대해 신이 스스로 벌하도록 내버려두었고, 도시가 받드는 신에 대해 시민들이 바쳐야 하는 유일한 존경심의 표시란 오직 일하지 않는 날에 일을 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사는 곳과 경제활동을 마음대로 바꿀 수가 있었다. 성범죄에 대해서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에 대해서도 너그럽게 용서하는 것으로 원로원에서 하나의 원칙으로 통과되기도 했다.

 

이러한 자유주의는 은연중에 '사생활에 대한 귀족적인 생각에서' 나왔을 뿐이며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로마에서도 이러한 자유를 법의 테두리 안에서 공식적으로 보장해 주지 않았다. 실제로 법은 한 집안이 맺고 있는 여러 관계를 충실히 지켜나갈 의무, 충성의 의무, 세습재산에 대한 책임, 그리고 개인의 지위들 간의 차이를 명문화한 것이었다.

 

'공적인' 반대말인 '사적인'은 라틴어에서 가장 흔히 사용되는 형용사 중의 하나였지만 사생활의 영역을 긍정적인 것으로 국한시켜주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부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이것은 공직을 수행하기 위해 요구되는 의무나 태도를 소홀히 하지 않는 한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을 가리켰다. 그리고 사생활이라고 해서 私權에 모든 것이 보장되는 성역이 아니었다. 실제 이 영역은 존중했지만 반드시 그것을 존중해 주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생활에 대한 영역은 법적인 보장 장치가 없었기 때문에 언제든지 위험이 닥칠 수 있었다. 이러한 위험은 마치 폭풍우처럼 순식간에 로마를 덮쳐왔는데, 가장 피비린내 나는 것이 기독교나 마니교에 대한 박해였다.

 

거기에 덧붙여 일부 황제들은 자기가 생각하는 윤리관을 강요하기도 했다. 중국의 군주와 달리 로마의 군주는 권력을 도덕에 비추어 가늠하는 유교의 오랜 관습을 갖고 있지 않았다. 아우구스투스는 엄격한 조치를 취해 겉모양이라도 기혼여성의 불륜을 막으려 했다. 도미티아누스는 연인들이 정식으로 결혼하도록 했으며, 정절을 지키겠다는 서약을 어긴 베스타 신전의 한 여사제를 생매장해버렸고, 풍자 시인들이 외설적인 낱말을 쓰지 못하게 했다. 세베루스 가문의 황제들은 남편의 간통을 경범죄로, 인공유산을 남편과 조국에 대한 범죄로 규정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입법을 통해 방종을 조장하던 낡은 귀족주의 전통을 기독교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민중 속에 뿌리박고 있던 엄격한 윤리로 대체했다.

 

그리스-로마 세계의 입법가들은 법령을 통해 사회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했다. 도시를 사회의 여러 경향들이 가진 자연스런 힘들이 만들어낸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법에 의해 만들어진 제도로 바라보았으며, 따라서 법으로 자연스런 현상을 제어하지 않으면 사회는 타락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이들이 보기에는 시민들은 선생님들의 엄한 감독을 받아야만 규율을 지키는 게으른 학생이었다. 따라서 풍속 개혁의 주된 목표는 모든 사람에게 현재의 황제가 말 그대로 주인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데 있었다.

 

이를 위해 황제들은 공공질서를 확립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각 개인의 도덕심까지도 다스리려 했다.

 

 

 

(*) 출처: 필립 아리에스, 조르주뒤비 책임편집 사생활의 역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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