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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무덤의 공공성'

by 상식살이 2024.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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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테리우스 가문의 무덤. 100년경

많은 사람들이 각 개인의 행위를 판단할 권리는 자기가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명사든 평민이든, 심지어 원로원 의원까지도 로마인이라면 누구나 자기만의 내밀한 삶을 고수할 수는 없었다. 모든 사람이 아무에게나 말을 걸 수 있고, 누구든 자기 식대로 평가할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이 서로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아무리 하찮은 사인(私人)이라도 단순한 개인들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 '공중(public)'에게 말을 건넬 수 있었는데, 하지만 이러한 공중 또한 특 수한 사적인 개인들의 집합에 불과했다.

예를 들어 누구든 청중을 즐겁게 하기 위해 대중 앞에서 농담을 할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이 거기에 가담했 다. 오늘날 뉴욕 지하철의 유명한 낙서에서도 이와 똑같은 것을 찾아볼 수 있다. 머리에 떠오른 생각을 벽 위에 모두 옮겨 적은 낙서를 통해 누구나 지하철 이용자나 행인들에게 자기 생각이나 사랑 또는 단지 그의 이름과 존재를 알릴 수 있는 것이다.

폼페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많은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이 작은 도시의 벽은 다른 사람들에게 즐거운 읽을거리를 마련해주려는 사람들이 쓴 낙서로 뒤덮여 있다. 기묘한 것은 오늘날의 공동 묘지에 해당하는 곳에 이와 비슷한 종류의 광고문이 널려 있었다는 점이다.

대로를 끼고 있는 이 장소들은 어느 한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었는데, 로마인들은 마을 어귀에 무덤을 만들어놓았다. 도시의 성문을 나서자마자 행인은 두 줄로 늘어선 무덤 사이를 지나게 되었다. 무덤은 저마다 행인의 눈길을 끌려고 노력했다.

묘비는 가족이나 친인척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땅 속의 무덤은 해마다 집안 사람들이 죽은 이에게 제사를 지내러 오는 대상으로서, 안에 이러저러한 비문을 적어넣어 길손의 눈길을 끌기 위한 묘비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따라서 이것을 오늘날 아무런 대상도 없이 그저 하늘에 대고 죽은 이를 기억하는 묘비 같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로마의 전형적인 묘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길손이여, 내가 이 세상에서 어떤 노릇을 했는지 한번 읽어 보오.......이제 나에 대해 다 읽었으니 조심해서 떠나시오." 그리고 길손도 "그대 역시 안녕히 계시오"라 고 돌 위에 새겨놓았다.

묘비들이 광고판처럼 두 줄로 죽 늘어서 있는 마을 어귀의 길을 보면, 이렇게 말해도 좋을지 모르지만, 저 세상에 '브로드웨이'의 광고판을 진열해놓은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특히 어떤 묘비는 다른 것들 속에서 유난 히 길손의 눈길을 끌려고 애썼다. 그것은 무덤들로 둘러싸인 울타리 안에 들어선 길손에게 기분 전환과 휴식을 위한 장소를 제공해주었다.

하지만 유족의 아픔에 대해 말하고 있는 묘비는 찾아볼 수 없으며 그보다는 죽은이의 사회적 역할과 함께 그가 가까운 사람들에게 얼마나 충실히 의무를 다했는지를 밝히고 있다. 길손은 그것으로 죽은 이를 판단하는 것이다.

대화나 저녁 식사 중에 자기가 어떤 무덤을 쓸 것인지에 대해 남에게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남에게 섣불리 장례식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세상을 뜬 뒤에도 그의 체면과 덕성이 오래오래 공식적으로 인정받을 것임을 확인시켜주었다. 일부 사람들은 몇 잔 마신 뒤 에 자기가 남길 유언만큼 정성스레 직접 지은 묘비명을 여유롭게 읽어주기도 했다.

도시가 공덕자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는 방법으로 그가 지낸 공직을 낱낱이 밝혀주는 것보다 더 좋은 것도 없었는데, 이것은 그의 장례식을 더욱 훌륭하게 빛내주었다. 어떤 귀부인은 동료 시민들이 자기 시신을 화장할 때 향내가 나도록 사프란을 마련해줄 것이라는 계획을 알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고고학자들은 지금까지 10만 개 이상의 묘비명을 발굴했는데, 맥멀렌은 묘비명을 새기는 유행이 1세기에 불붙었다가 3세기에는 서서히 불길 이 꺼지기 시작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전혀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묘비명은 죽음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을 반영했던 것이 아니라 공적인 언어와 통제가 지배력을 발휘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 은 거물급 인사에만 국한되지도 않았다. 순수하게 사적인 개인도 공인이 아니었음에도 어쨌든 동료들의 눈길 아래 공적으로 생활했다.

따라서 이들은 유언과 마찬가지로 묘비명에서도 대중에게 이런 말을 남기게 되었 다. "나는 그저 내게 주어진 운명대로 평생 보잘것없이 살아왔노라. 그래서 그대들에게 충고하나니, 나보다 더욱 즐겁게 살도록 하라. 바로 그게 삶일지니. 그 이상을 더 바라서 무엇하리. 사랑하고, 마시고, 목욕탕에 다니라. 그것이 진짜 삶일지니. 그 밖엔 아무것도 남지 않으리. 나는 철학자의 말을 한 번도 듣지 않았다. 의사들의 말도 믿지 마라. 그들이 바로 나를 죽인 장본인이라네." 죽은 이는 자기 삶에서 산 사람들을 위한 교훈을 끌어냈다. 이러한 묘비명들에는 저 세상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기 때문에 기독교에서 영향받은 역사가들은 너무 저 세상에 대해서만 매달려 연구한결과 이 무덤들이 공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그리고 묘비명은 종종 비난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즉 법정에 고소하도록 만든 어떤 사람을 고발하는 내용도 종종 발견된다. 어떤 보호자는 유언을 남기듯이 은혜를 모르는 해방 노예를 힐난하면서 그를 노상강도처럼 취급했다. 어떤 아버지는 자기 딸이 자격이 없어서 상속권을 빼앗았노라고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다. 어떤 어머니는 자기 아기가 죽은 것은 어떤 여인이 독살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한 사실을 무덤에 새겨 넣는 것은 우리에게는 죽음의 엄숙함을 해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로마 인은 더러운 속옷을 몰래 빨지 않았다. 그들은 모든 것을 보란 듯이 대놓고 했다. 폼페이의 누체리아 거리에 있는 묘비명에는 은혜를 저버린 친구가 천국과 지옥의 신들에게서 노여움을 사기를 바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출처: 필립 아리에스, 조르주뒤비 책임편집 사생활의 역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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