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로마인의 탄생과 가족 구성

by 상식살이 2024. 5. 15.
반응형

 

산파 한명은 의자에 앉은 산모를 잡고 있고 또 한명은 아이를 받고 있다./사생활의 역사

 

로마인의 탄생은 태어난다는 의미보다는 사회 속에 받아들여진다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피임과 유산으로 태어나지도 못하는 생명과 자유민으로 태어났으나 버려지는 아이들, 그리고 여자 노예의 몸에서 태어난 아기를 죽이는 일은 늘상 있었던 일이고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로마에서 시민은 자식을 낳는 것이 출생의 완성이 아니며,아버지가 아들을 '잡고' 쳐들어야만 진정한 의미의 자식으로 인정하고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자식이 태어나면 곧 아기를 자신의 자식으로 인정하고 버리지 않겠다는 뜻을 표시하기 위해 산파가 땅에 내려놓은 아기를 들어 올리는 행위를 했다. 아버지가 쳐들지 않은 아기는 문 앞이나, 쓰레기장에 버려졌다.

 

그리스인과 로마인은 이집트인, 게르만인, 유대인들이 자식을 모두 거두고 하나도 버리지 않는 사실을 기이하게 생각했다.

 

로마인들은 기형아를 낳으면 버리거나 물에 빠뜨렸다. 또한 '사고를 쳐서 임신한 딸이 출산한' 딸의 아기도 마찬가지로 버려지거나 물에 빠뜨리기도 했다. 특히 태어난 아기를 합법적으로 버리는 경우는 생활고로 인한 가난때문이거나 자손들에게 많지 않은 재산을 제대로 물려주기 위한 방법으로 선택을 했다. 가난한 사람은 아기를 기를 수 없어 버렸고, 중류층의 사람들은 아이가 일정 수준이상의 지위와 자질을 가질 수 는 훌륭한 교육을 받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아이를 버리는 선택을 했던 것이다. 

 

그러면 버려진 아기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들이 살아 남는일은 극히 드물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부자들은 아기가 다시 나타나지를 않기를 바랐던 데 반해, 오직 가난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버려야 했던 가난한 사람들은 언젠가 아기를 되찾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어떤 경우는 아기를 버리는 시늉만 할 때도 가끔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남편 모르게 아기를 이웃이나 아랫사람에게 맡겨 비밀리에 기르게 했는데 그 아이는 결국 길러준 사람의 노예가 되었으며, 나중에 이 아이가 성장하게 되면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켜주었다고 한다.

 

로마에서는 나의 핏줄로 태어났는지 여부보다는 가문를 더 중시했다.사생아로 태어난 아기에 경우는 어머니의 성을 받았으며 적자로 인정 받지도 못했고 이을 위한 친자 확인 같은 일은 하지도 않았고 필요하지 않았다. 아버지로부터 잊혀지거나 버려진 사생아들은 로마에서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거의 아무런 역할도 못했다.

 

하지만 해방노예는 그렇지 않았다. 이들 중에는 때로 아주 부유하고 막강한 권세를 가진 사람도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자식을 기사나 심지어 원로원 의원 신분까지 밀어 올리는 경우도 가끔있었다. 당시 과두정의 지배층은 자신들의 적자와 과거에 자기 노예였던 사람들의 자식들로 성원을 보충했다. 해방노예는 그를 해방시켜준 주인의 성을 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성을 계속 물려받았다. 이는 로마시대에서 아주 빈번한 일이었으며, 명문가에서는 자신의 가문 영향력 확대를 위해 통용되어 왔던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구경꾼을 향하여 반쯤 몸을 돌리고 있는 귀부인과 해방노예/사생활의역사

 

로마에서 가구는 노예와 한때 노예였던 해방노예, 그 집안의 가장과 그의 합법적인 아내, 자녀 두세 명이 한 집안 식구를 이루고 있었다. 여기에 수십명의 자유민과 자신들의 보호자에게 문안드리기 위해 새벽마다 응접실에 줄을 서는 피보호자 몇명이 있었다. 이러한 한 집안 식구의 구성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자연스러운 가족 형태는 아니었다. 따라서 이들이 한 식구로서 느끼는 감정은 우리 자신이 가족에 대해 느끼는 감정만큼이나 오랜 된 것이지만 분명 훨씬 특이하고 동일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 집안의 가장은 남편이자 집안의 재산 소유자인 동시에 노예의 주인이며, 해방 노예와 피보호자들의 보호자이기도 하다. 그는 도시 국가들로부터 권위를 일부 위임받아 자기 자녀들에 대해 재판권을 행사했다. 이처럼 이질적인 권력들의 혼합물은 어떤 단일한 실체로부터 유래한 것은 아닐 것으로 보인다.

 

어떤 집안의 아들이건 일단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서 자유롭게 되면 새로운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새로운 집안의 가장이 되면 직계 형제들이나 아버지 형제들인 삼촌들과는 해묵은 감정이나 가족 간의 이해관계 외에는 실질적인 애정은 남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가족은 부부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 남아 있는 형제들은 조상 대대로 살던 큰집에 함께 살지 여부는 본인들의 편리성과 경제력에 따라 결정되었다. 로마시대 가장이라면 누구나 자기만의 가정을 만들고 싶어 했고 남자 형제뿐만 아니라 딸들도 마찬가지였다.

 

가장은 한 집안의 재산과 재산에 관한 모든 권리를 소유했다. 그는 돈과 상속에 대한으로 수단으로 자식을 통제하고 복종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식을 본인 가까운 곳에 두려고 하지는 않았다. 새로 결혼한 자식 부부들도 경제적 여건이 되거나, 수단이  마련되면 가능한 자기 집을 갖고 싶어 했다.

 

한집안의 가장은 원칙상 식구를 이끌었다. 그는 아침마다 노예에게 명령을 내리고 할 일을 배분했다. 관리인에게 회계를 맡기고 보고를 받았다. 가장과 아내의 역할에서 마찰이 생기는 경우가 발생을 했다. 로마시대 남편의 전부는 아니었지만 일부는 아내가 가사를 책임지도록 했다. 가사를 책임질 정도의 능력이 되는 아내에게는 금고 열쇠를 맡기기도 했다. 아내들은 언제나 가까이 노예를 두고 일을 시켰으며, 결코 혼자 있는 일이 없었다. 이들은 스스로 옷을 입고 신을 신는 것조차 노예로부터 시중을 받았다. 

 

 

 

출처: 필립 아리에스, 조르주뒤비 책임편집 사생활의 역사에서

 

 

반응형